9. 대념처경(大念處經) <22. Mahā-Satipaṭṭhāna Sutta>



<해제>

 

싸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는 주의집중(注意集中)을 의미하는 싸띠(sati)와 확립(確立)을 의미하는 빳타나(paṭṭhāna)의 합성어로서, 주의집중 수행을 의미한다. 한역(漢譯)에서는   염처(念處)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한역(漢譯)하면 <대념처경(大念處經)>이 된다. 이 경의 한역(漢譯)은 『장아함경(長阿含經)』에는 없고, 『중아함경(中阿含經)』에 <염처경(念處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다.

염처(念處) 수행은 구체적으로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의미하는데, 붓다가 이 경에서 열반을 성취하는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강조하듯이, 사념처 수행은 불교 수행의 시작과 끝이다. 근본불교의 수행법을 망라하여 37조도품(助道品)이라고 하는데, 37조도품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성을 겉으로만 보면 사념처는 불교수행의 출발점이고, 팔정도는 종착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을 통해서 보면, 사념처는 37조도품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사념처 수행을 구체적으로 전개하면 37조도품이 된다. 

사념처에서 시작되는 불교 수행은 자연스럽게 사정근(四正勤)으로 이어진다. 사정근은 염처 수행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는 가운데, 자신의 못된 점은 반성하여 없애고, 좋은 점은 살펴서 키워가는 수행이다. 따라서 사정근은 사념처와 다른 수행이 아니라 사념처 수행의 연장인 것이다. 

사신족(四神足)은 사정근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와 마음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 것을 의미한다. 욕망에 구속된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의욕을 일으키고, 바른 생각을 일으켜서, 사념처 수행을 자신의 뜻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사신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근(五根)은 사신족의 성취를 통해서 불교수행에 확신을 가지고(信根) 정진하면서(精進根) 염처(念處) 수행을 통해서(念根) 선정에 들어(定根) 지혜가 밝아지게 되는(慧根) 것을 의미한다. 

오력(五力)은 오근(五根)이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으로 성장한 것을 의미한다. 

칠각지(七覺支)는 염각지(念覺支),  택법각지(擇法覺支), 정진각지(精進覺支), 희각지(喜覺支),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사각지(捨覺支)로 이루어져 있는데, 염각지는 사념처를 의미하고, 택법각지와 정진각지는 사정근을 의미하며, 희각지, 경안각지, 정각지, 사각지는 사신족과 오근과 오력을 통해서 얻게 되는 선정(禪定)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팔정도(八正道)의 정념(正念;sammā-sati)은 사념처 수행을 의미하기 때문에, 팔정도는 정견(正見)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사념처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수행법이 나타났지만, 붓다가 가르친 열반을 성취하는 유일한 수행법은 사념처이다. 불교를 수행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이 경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1.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쑤(Kurūsu)에 있는 꾸루(Kurū)족의 마을 깜마싸담마(Kammāssadhamma)에 머무시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하고 비구들을 불렀습니다. 비구들은 “예, 스승님!” 하고 세존께 응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근심과 슬픔을 극복하고, 괴로움과 불만을 소멸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열반을 자증(自證)할 수 있는 유일한 청정한 길은 오직 네 가지 주의집중(四念處)뿐이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身)을 관찰하며 몸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감정(受)을 관찰하며 감정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마음(心)을 관찰하며 마음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법(法)을 관찰하며 법(法)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2.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숲이나, 나무 아래나, 한가한 장소에 가서 가부좌를 한 후에, 몸을 곧추세우고 앉아 앞을 향하고, 주의집중을 준비한 다음, 주의를 집중하여 들이쉬고, 주의를 집중하여 내쉰다오. 길게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리고, 길게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짧게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리고, 짧게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나는 온 몸으로 느끼면서 들이쉬겠다.’라고 수습(修習)하고, ‘나는 온 몸으로 느끼면서 내쉬겠다.’라고 수습한다오. ‘나는 신행(身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서 들이쉬겠다.’라고 수습하고, ‘나는 신행(身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서 내쉬겠다.’라고 수습한다오.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솜씨 있는 도공(陶工)이나 도공의 제자가 (흙덩이를) 길게 당기면서 ‘나는 길게 당긴다.’라고 알아차리고, 짧게 당기면서 ‘나는 짧게 당긴다.’라고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리고, 길게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짧게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리고, 짧게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나는 온 몸으로 느끼면서 들이쉬겠다.’라고 수습(修習)하고, ‘나는 온 몸으로 느끼면서 내쉬겠다.’라고 수습한다오. ‘나는 신행(身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서 들이쉬겠다.’라고 수습하고, ‘나는 신행(身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서 내쉬겠다.’라고 수습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集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滅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3.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가면서는, ‘나는 가고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서있으면서는, ‘나는 서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앉아서는 ‘나는 앉아있다.’라고 알아차리고, 누워서는 ‘나는 누워있다.’라고 알아차린다오. 그는 몸이 취한 자세를 그대로 알아차린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集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滅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4.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나아가고 물러날 때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돌아볼 때 알아차리고, 구부리고 펼 때 알아차리고, 가사(袈裟)와 발우와 승복을 지닐 때 알아차리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 알아차리고, 대소변을 볼 때 알아차리고, 가고, 서고, 앉고, 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할 때 알아차린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5.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이 몸을, ‘이 몸에는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염통, 간, 늑막, 비장, 허파, 창자, 내장, 위, 똥, 쓸개, 가래, 고름, 피, 땀, 기름, 눈물, 비계, 침, 콧물, 활액(滑液), 오줌이 들어있다.’라고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피부 속에 가득 찬 갖가지 더러운 것을 낱낱이 관찰한다오.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갖가지 곡물들 즉, 쌀, 벼, 녹두, 콩, 참깨, 기장으로 가득 찬, 양쪽이 터진 자루를 안목(眼目) 있는 사람이 풀어놓고, ‘이것은 쌀이다. 이것은 벼다. 이것은 녹두다. 이것은 콩이다. 이것은 참깨다. 이것은 기장이다.’라고 낱낱이 관찰하는 것과 같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이 몸에는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염통, 간, 늑막, 비장, 허파, 창자, 내장, 위, 똥, 쓸개, 가래, 고름, 피, 땀, 기름, 눈물, 비계, 침, 콧물, 활액(滑液), 오줌이 들어있다.’라고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피부 속에 가득 찬 갖가지 더러운 것을 낱낱이 관찰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6.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이 몸을 있는 그대로, 취한 자세 그대로, ‘이 몸에는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가 있다.’라고 계(界)를 낱낱이 관찰한다오.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솜씨 있는 소백정이나 소백정의 제자가 암소를 잡아 큰 사거리에 부위별로 나누어 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있는 그대로, 취한 자세 그대로, ‘이 몸에는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가 있다.’라고 계(界)를 낱낱이 관찰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7.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서, 부풀어 오르고, 검푸르게 변한, 예전에 죽어버린,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면, 비구는 이 몸과 비교하여, ‘이 몸은 이와 같은 현상(法)이고, 이와 같이 존재하며,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8.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까마귀나, 독수리나, 개나, 늑대가 먹고 있거나, 갖가지 버러지가 생겨서 파먹고 있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면, 비구는 이 몸과 비교하여, ‘이 몸은 이와 같은 현상(法)이고, 이와 같이 존재하고,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9.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붉은 살점이 붙어있는 해골을 힘줄이 결합하고 있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거나, 붉은 살점으로 더럽혀진 해골을 힘줄이 결합하고 있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거나, 붉은 살점이 사라진 해골을 힘줄이 결합하고 있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거나, 결합하는 힘줄이 사라져, 손뼈는 손뼈대로, 다리뼈는 다리뼈대로, 경골(脛骨)은 경골대로, 대퇴골(大腿骨)은 대퇴골대로, 요추(腰椎)는 요추대로 척추(脊椎)는 척추대로, 두개골(頭蓋骨)은 두개골대로, 뼈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채로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면, 비구는 이 몸과 비교하여, ‘이 몸은 이와 같은 현상(法)이고, 이와 같이 존재하고,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10.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뼈 조각들이 하얗게 조개껍질 색처럼 된,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거나, 뼈 조각들이 말라서 수북하게 쌓인,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거나, 뼈 조각들이 썩어서 가루가 된,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면, 비구는 이 몸과 비교하여, ‘이 몸은 이와 같은 현상(法)이고, 이와 같이 존재하고,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오.

11.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감정(受)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운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리고, 괴로운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괴로운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육체적인 즐거운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리고, 정신적인 즐거운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리고, 육체적인 괴로운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육체적인 괴로운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리고, 정신적인 괴로운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정신적인 괴로운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리고, 육체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육체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리고, 정신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정신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느낀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감정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물고, 밖으로 감정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감정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감정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감정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머문다오.

12.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心)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탐욕(貪)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성냄(瞋)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어리석음(癡)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넓은 마음을 ‘넓은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옹졸한 마음을 ‘옹졸한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최상의 마음을 ‘최상의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무상(無上)의 마음을 ‘무상(無上)의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린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마음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물고, 밖으로 마음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마음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물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마음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머문다오.    

13.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法)을 관찰하면서 법(法)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법(法)을 관찰하면서 다섯 가지 번뇌(五蓋) 법(法)에 머문다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法)을 관찰하면서 다섯 가지 번뇌(煩惱) 법(法)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속에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의 마음속에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나의 마음속에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발생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멸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미래에 발생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린다오.
마음속에 분노(憤怒)가 있으면, ‘나의 마음속에 분노가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분노가 없으면, ‘나의 마음속에 분노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분노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발생한 분노가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멸한 분노가 어떻게 미래에 발생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린다오.
마음속에 혼침(昏沈)과 수면(睡眠)이 있으면, ‘나의 마음속에 혼침과 수면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혼침과 수면이 없으면, ‘나의 마음속에 혼침과 수면이 없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혼침과 수면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발생한 혼침과 수면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멸한 혼침과 수면이 어떻게 미래에 발생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린다오.
마음속에 들뜸(掉擧)과 걱정이 있으면, ‘나의 마음속에 들뜸과 걱정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들뜸과 걱정이 없으면, ‘나의 마음속에 들뜸과 걱정이 없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들뜸과 걱정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발생한 들뜸과 걱정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멸한 들뜸과 걱정이 어떻게 미래에 발생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린다오.

마음속에 의심(疑心)이 있으면, ‘나의 마음속에 의심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의심이 없으면, ‘나의 마음속에 의심이 없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의심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발생한 의심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멸한 의심이 어떻게 미래에 발생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린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법(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법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法)을 관찰하면서 다섯 가지 번뇌(煩惱) 법(法)에 머문다오.

14.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법을 관찰하면서 오취온(五取蘊) 법에 머문다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을 관찰하면서 오취온(五取蘊) 법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은 색(色)이다. 이것은 색(色)의 집(集)이다. 이것은 색(色)의 멸(滅)이다. - 이것은 수(受)다. 이것은 수(受)의 집(集)이다. 이것은 수(受)의 멸(滅)이다. - 이것은 상(想)이다. 이것은 상(想)의 집(集)이다. 이것은 상(想)의 멸(滅)이다. - 이것은 행(行)이다. 이것은 행(行)의 집(集)이다. 이것은 행(行)의 멸(滅)이다. - 이것은 식(識)이다. 이것은 식(識)의 집(集)이다. 이것은 식(識)의 멸(滅)이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법(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법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法)을 관찰하면서 오취온(五取蘊) 법(法)에 머문다오.

15.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법을 관찰하면서 여섯 가지 내외입처(六內外入處) 법에 머문다오.
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을 관찰하면서 육내외입처(六內外入處) 법에 머무는가?
비구는 보는 나(眼)를 알아차리고, 보이는 형색들(色)을 알아차리고, 그 둘을 의지하여 결박(結縛)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결박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발생한 결박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멸한 결박이 어떻게 미래에 발생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린다오. 
듣는 나(耳)를 알아차리고, 들리는 소리들(聲)을 알아차리고, 냄새 맡는 나(鼻)를 알아차리고, 냄새들(香)을 알아차리고, 맛보는 나(舌)를 알아차리고, 맛들(味)을 알아차리고, 만지는 나(身)를 알아차리고, 만져지는 촉감들(觸)을 알아차리고, 의식하는 나(意)를 알아차리고, 의식되는 법들(法)을 알아차리고, 그 둘을 의지하여 결박(結縛)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결박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발생한 결박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멸한 결박이 어떻게 미래에 발생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린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법(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법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을 관찰하면서 육내외입처(六內外入處) 법에 머문다오.

16.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법을 관찰하면서 칠각지(七覺支) 법에 머문다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을 관찰하면서 칠각지(七覺支) 법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속에 염각지(念覺支)가 있으면, ‘내 마음속에 염각지(念覺支)가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마음속에 염각지(念覺支)가 없으면, ‘내 마음속에 염각지(念覺支)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염각지(念覺支)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아차리고, 발생한 염각지(念覺支)의 수습(修習)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알아차린다오. 

마음속에 택법각지(擇法覺支)가 있으면, <중략>

마음속에 정진각지(精進覺支)가 있으면, <중략>

마음속에 희각지(喜覺支)가 있으면, <중략>

마음속에 경안각지(輕安覺支)가 있으면, <중략>

마음속에 정각지(定覺支)가 있으면, <중략>

마음속에 사각지(捨覺支)가 있으면, ‘내 마음속에 사각지(捨覺支)가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마음속에 사각지(捨覺支) 없으면, ‘내 마음속에 사각지(捨覺支)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오. 발생하지 않았던 사각지(捨覺支)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아차리고, 발생한 사각지(捨覺支)의 수습(修習)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알아차린다오. 

17. 비구들이여, 다음으로 비구는 법을 관찰하면서 사성제(四聖諦) 법에 머문다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을 관찰하면서 사성제(四聖諦) 법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苦)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아차리고, ‘이것이 괴로움(苦)의 집(集)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아차리고, ‘이것이 괴로움(苦)의 소멸(滅)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아차리고, ‘이것이 괴로움(苦)의 소멸(滅)에 이르는 길(道)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아차린다오.

18. 비구들이여, 고성제(苦聖諦)란 어떤 것인가? 태어남(生)은 괴롭고, 늙음(老)은 괴롭고, 병(病)은 괴롭고, 죽음(死)은 괴롭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불안은 괴롭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롭다오. 한마디로 말해서, 오취온(五取蘊)은 괴롭다오.
비구들이여, 태어남(生)이란 어떤 것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이 이런 저런 중생의 부류 속에 태어남, 탄생, 출현, 출생, 온(蘊)들의 현현(顯現), 입처(入處)들의 획득(獲得), 비구들이여,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늙음(老)이란 어떤 것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이 이런 저런 중생의 부류 속에서 늙음, 노쇠함, 이가 빠지고 백발이 됨, 피부가 주름짐, 수명이 짧아짐, 감각기능(根)들의 쇠퇴, 비구들이여,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죽음(死)이란 어떤 것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이 이런 저런 중생의 부류에서 사라짐, 소멸함, 파괴됨, 소실됨, 사망함, 죽음, 종말, 온(蘊)들이 파괴됨, 시체를 매장함, 비구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슬픔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다양한 불행에 따르는, 다양한 괴로움을 겪음으로써 생긴 슬픔, 시름, 비통, 마음속의 슬픔, 마음속의 큰 슬픔, 비구들이여, 이것을 슬픔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비탄(悲嘆)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다양한 불행에 따르는, 다양한 괴로움을 겪음으로써 생긴 한탄, 비탄, 비읍(悲泣), 통곡(慟哭), 비구들이여, 이것을 비탄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신체적인 괴로움, 신체적인 불쾌함, 신체적인 접촉/경험에서 생긴 괴롭고 불쾌한 감정, 비구들이여, 이것을 고통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근심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심적(心的)인 괴로움, 심적인 불쾌함, 심적인 접촉/경험에서 생긴 괴롭고 불쾌한 감정, 비구들이여, 이것을 근심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불안(不安)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다양한 불행에 따르는, 다양한 괴로움을 겪음으로써 생긴 초조(焦燥), 불안, 걱정, 절망, 비구들이여, 이것을 불안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롭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나는 중생들에게 ‘아아! 제발 우리가 태어나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제발 우리에게 태어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으련만’하는 소망이 생긴다오. 그런데 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이와 같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롭다오. 비구들이여, 늙어가는 중생들에게, 죽어가는 중생들에게, 슬퍼하고, 비탄에 빠지고, 고통 받고, 근심하고, 불안한 중생들에게 ‘아아! 제발 우리가 슬퍼하고 비탄에 빠지고, 고통 받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제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으련만’하는 소망이 생긴다오. 그런데 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이와 같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롭다오.

비구들이여, ‘한마디로 말해서, 오취온(五取蘊)은 괴롭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 비구들이여, 이것들을 ‘한마디로 말해서 오취온(五取蘊)은 괴롭다.’고 하는 것이라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고성제(苦聖諦)라고 한다오.

19. 비구들이여, 고집성제(苦集聖諦)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 좋아하고 탐착하며, 이것저것을 애락(愛樂)하는 갈애(渴愛) 즉,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라오. 
비구들이여, 그 갈애(渴愛)는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어디에 안주(安住)하고 있는가? 세간(世間)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色), 기쁨을 주는 것,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으며,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어떤 것이 세간(世間)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인가? 보는 나(眼)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듣는 나(耳), 냄새 맡는 나(鼻), 맛보는 나(舌), 만지는 나(身), 의식하는 나(意)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들이(色), 들리는 소리들이(聲), 냄새들이(香), 맛들(味)이, 촉감들(觸)이, 의식되는 법들(法)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안식(眼識)이, 이식(耳識)이, 비식(鼻識)이, 설식(舌識)이, 신식(身識)이 의식(意識)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안촉(眼觸)이, 이촉(耳觸)이, 비촉(鼻觸)이, 설촉(舌觸)이, 신촉(身觸)이, 의촉(意觸)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안촉(眼觸)에서 생긴 감정(受)이, 이촉(耳觸)에서 생긴 감정이, 비촉(鼻觸)에서 생긴 감정이, 설촉(舌觸)에서 생긴 감정이, 신촉(身觸)에서 생긴 감정이, 의촉(意觸)에서 생긴 감정(受;vedanā)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관념(色想)이, 들리는 소리에 대한 관념(聲想)이, 냄새에 대한 관념(香想)이, 맛에 대한 관념(味想)이, 촉감에 대한 관념(觸想)이, 의식되는 법에 대한 관념(法想)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의욕(色思)이, 들리는 소리에 대한 의욕聲思)이, 냄새에 대한 의욕(香思)이, 맛에 대한 의욕(味思)이, 촉감에 대한 의욕(觸思)이, 의식되는 법에 대한 의욕(法思)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갈애(色愛)가, 들리는 소리에 대한 갈애(聲愛)가, 냄새에 대한 갈애(香愛)가, 맛에 대한 갈애(味愛)가, 촉감에 대한 갈애(觸愛)가, 법에 대한 갈애(法愛)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사유(思惟)가, 들리는 소리에 대한 사유(思惟)가, 냄새에 대한 사유(思惟)가, 맛에 대한 사유(思惟)가, 촉감에 대한 사유(思惟)가, 의식되는 법에 대한 사유(思惟)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숙고(熟考)가, 들리는 소리에 대한 숙고(熟考)가, 냄새에 대한 숙고(熟考)가, 맛에 대한 숙고(熟考)가, 촉감에 대한 숙고(熟考)가, 의식되는 법에 대한 숙고(熟考)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발생하고 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고집성제(苦集聖諦)라고 한다오.

20. 비구들이여, 고멸성제(苦滅聖諦)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갈애(渴愛)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이며, 그 갈애를 버리는 것이며, 포기하는 것이며, 그 갈애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 갈애를 염리(厭離)하는 것이라오.
비구들이여, 그 갈애는 어디에서 소멸(消滅)하고 있고, 어디에서 지멸(止滅)하고 있는가? 
세간(世間)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지멸(止滅)하고 있다오. 
어떤 것이 세간(世間)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인가? 보는 나(眼)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듣는 나(耳), 냄새 맡는 나(鼻), 맛보는 나(舌), 만지는 나(身), 의식하는 나(意)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色)들이, 들리는 소리(聲)들이, 냄새(香)들이, 맛(味)들이, 촉감(觸)들이, 의식되는 법(法)들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안식(眼識)이, 이식(耳識)이, 비식(鼻識)이, 설식(舌識)이, 신식(身識)이, 의식(意識)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안촉(眼觸)이, 이촉(耳觸)이, 비촉(鼻觸)이, 설촉(舌觸)이, 신촉(身觸)이, 의촉(意觸)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안촉(眼觸)에서 생긴 감정(受)이, 이촉(耳觸)에서 생긴 감정(受)이, 비촉(鼻觸)에서 생긴 감정(受)이, 설촉(舌觸)에서 생긴 감정(受)이, 신촉(身觸)에서 생긴 감정(受)이, 의촉(意觸)에서 생긴 감정(受)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관념(色想)이, 들리는 소리에 대한 관념(聲想)이, 냄새에 대한 관념(香想)이, 맛에 대한 관념(味想)이, 촉감에 대한 관념(觸想)이, 법에 대한 관념(法想)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의욕(色思)이, 들리는 소리에 대한 의욕(聲思)이, 냄새에 대한 의욕(香思)이, 맛에 대한 의욕(味思)이, 촉감에 대한 의욕(;觸思)이, 의식되는 법에 대한 의욕(法思)이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갈애(色愛)가, 들리는 소리에 대한 갈애(聖愛)가, 냄새에 대한 갈애(香愛)가, 맛에 대한 갈애(味愛)가, 촉감에 대한 갈애(觸愛)가, 의식되는 법에 대한 갈애(法愛)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사유(思惟)가, 들리는 소리에 대한 사유(思惟)가, 냄새에 대한 사유(思惟)가, 맛에 대한 사유(思惟)가, 촉감에 대한 사유(思惟)가, 의식되는 법에 대한 사유(思惟)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보이는 형색에 대한 숙고(熟考)가, 들리는 소리에 대한 숙고(熟考)가, 냄새에 대한 숙고(熟考)가, 맛에 대한 숙고(熟考)가, 촉감에 대한 숙고(熟考)가, 법에 대한 숙고(熟考)가 세간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오. 거기에서 그 갈애는 소멸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멸하고 있다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고멸성제(苦滅聖諦)라고 한다오.    

21. 비구들이여,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성자(聖者)의 팔정도(八正道) 즉,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라오. 

비구들이여, 정견(正見)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苦)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집(苦集)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苦滅)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苦滅道)에 대하여 아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정사(正思)란 어떤 것인가? 
욕망에서 벗어나려는(出離) 생각, 화내지 않으려는(無恚) 생각, 해치지 않으려는(非暴力) 생각,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사(正思)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정어(正語)란 어떤 것인가? 
거짓말 안하기(不妄語), 이간질 안하기(不兩舌), 욕설 안하기(不惡口), 쓸데없는 잡담 안하기(不綺語),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어(正語)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정업(正業)이란 어떤 것인가?
생명 죽이지 않기(不殺生), 주지 않는 것 훔치지 않기(不偸盜), 삿된 음행(淫行) 하지 않기(不邪淫),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업(正業)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정명(正命)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성자의 제자는 삿된 생업(生業)을 버리고, 바른 생업으로 살아간다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명(正命)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정정진(正精進)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발생하지 않은 사악하고 옳지 못한 법(惡不善法)들은 생기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힘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한다오. 발생한 사악하고 옳지 못한 법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힘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한다오. 발생하지 않은 옳은 법(善法)들은 생기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힘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한다오. 발생한 옳은 법들은 머물고, 망실되지 않고, 증가하고, 충만해지고, 수습(修習)하고, 성취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힘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한다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정진(正精進)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정념(正念)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身)을 관찰하며 몸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감정(受)을 관찰하며 감정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마음(心)을 관찰하며 마음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법(法)을 관찰하며 법(法)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을 하고 알아차려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하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정정(正定)이란 어떤 것인가?
비구는 욕망을 멀리하고, 불선법(不善法)을 멀리하여, 사유가 있고, 숙고가 있는, 멀리함에서 생긴 즐거움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살아간다오. 사유와 숙고를 억제하여, 내적으로 조용해진, 마음이 집중된, 사유와 숙고가 없는, 삼매에서 생긴 즐거움과 행복이 있는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살아간다오. 즐거움과 이욕(離欲)으로부터 초연하여 평정한 마음으로 주의집중과 알아차림을 하며 지내는 가운데 몸으로 행복을 느끼면서, 성자(聖者)들이 ‘평정한 주의집중을 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이야기한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살아간다오. 행복감을 포기하고, 괴로움을 버림으로써, 이전의 만족과 불만이 소멸하여, 괴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평정한 주의집중이 청정한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살아간다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정(正定)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라고 한다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안과 밖으로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모여서 나타나는 법(集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물고, 모여서 나타나고 소멸하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에 머문다오. 그러면 단지 알아차릴 정도로만, 단지 주의집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집중이 일어난다오. 그는 의존하지 않고 머물며, 세간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을 관찰하면서 사성제(四聖諦) 법에 머문다오.

22.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칠안거(七安居) 동안 이 사념처(四念處)를 이와 같이 수행하면, 지금 여기에서 깨닫거나(阿羅漢), 유여(有餘)의 불환과(不還果), 둘 가운데 하나의 과(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칠안거(七安居) 동안 지속하도록 하시오. 누구든지 육안거(六安居) 동안 이 사념처(四念處)를 이와 같이 수행하면, ......  오안거(五安居) 동안 ...... , 사안거(四安居) 동안 ...... , 삼안거(三安居) 동안 ...... , 이안거(二安居) 동안 ...... , 일안거(一安居) 동안 이 사념처(四念處)를 이와 같이 수행하면, 지금 여기에서 깨닫거나, 유여(有餘)의 불환과(不還果), 둘 가운데 하나의 과(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일안거(一安居) 동안 지속하도록 하시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일곱 달 동안 이 사념처(四念處)를 이와 같이 수행하면, 지금 여기에서 깨닫거나, 유여(有餘)의 불환과(不還果), 둘 가운데 하나의 과(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일곱 달 동안 지속하도록 하시오. 누구든지 여섯 달 동안 ...... , 다섯 달 동안 ...... , 넉 달 동안 ......, 석 달 동안 ...... , 두 달 동안 ...... , 한 달 동안 ...... , 반 달 동안 이 사념처(四念處)를 이와 같이 수행하면, 지금 여기에서 깨닫거나, 유여(有餘)의 불환과(不還果), 둘 가운데 하나의 과(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반 달 동안 지속하도록 하시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칠일(七日) 동안 이 사념처(四念處)를 이와 같이 수행하면, 지금 여기에서 깨닫거나, 유여(有餘)의 불환과(不還果), 둘 가운데 하나의 과(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근심과 슬픔을 극복하고, 괴로움과 불만을 소멸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열반을 자증(自證)할 수 있는 유일한 청정한 길은 오로지 네 가지 주의집중(四念處) 뿐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그런 것이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그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에 기뻐하고, 환희했습니다.   

 

출처: 정선 디가 니까야 <이중표 역해>